아니쉬 카푸어 : 반타 블랙
본문 바로가기
뭐 볼까?/그림리뷰

아니쉬 카푸어 : 반타 블랙

by 게으른_완벽주의자 2023. 10. 14.
반응형

국제갤러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아니쉬 카푸어의 개인전이 다음 주면 종료된다.
한국에선 7년 만에 열리는 데다, 여러 의미로 Hot한 예술가의 작품들이! 무료로! 그것도 서울에서! 진행되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 늦기 전에 한 번쯤은 가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뒤늦게나마 전시회 정보를 공유해 본다.


전시 정보

🏛 장소 : 국제갤러리 (서울 종로구 삼청로 54)
🚌 대중교통 : 3호선 안국역/경복궁역, 5호선 광화문역에서 도보 10~15.
마을버스 이용 시 삼청동 방면 11번 탑승 후 정독도서관 정류장 하차.

🚗 주차장 : 없음. 근처의 공영주차장 혹은 유료 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 입장료 : 없음 (*현장 상황에 따라 입장 대기 혹은 조기 마감 가능성 있음)

⏲ 운영시간 : 10:00 ~ 18:00 (일요일 및 공휴일 17:00)

📆 전시 기간 : 2023.08.30 ~ 2023.10.22


아니쉬 카푸어와 반타 블랙

우선 아니쉬 카푸어라고 하면 반타 블랙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빛 흡수율 99.965%로 모든 물체를 평면처럼 만들어버리는 세상에서 가장 까만 검은색이었던 반타 블랙! (현재는 MIT에서 99.995% 흡수하는 가장 완벽한 검은색 – redemption of vanity’를 발명해 버린 탓에 1위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 반타 블랙 때문에 아니쉬 카푸어는 전 세계 예술가들에게 지탄을 받게 된다.

반타블랙을 칠한 가면 from Surrey Nanosystem's homepage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2014, 반타 블랙이 만들어진다. 그간 검은색은 여러 색깔을 섞어 만들어, 눈으로 보기엔 검은색 이어도 빛을 비추면 갈색 빛 혹은 푸른빛이 보이는 등 완벽하지 못했다. 그래서 영국 제조회사인 Surrey Nano System에서 탄소 나노튜브 공학을 이용해 군사, 우주항공에 사용을 목적으로 하는 검은색을 만들었다. 이 제작 과정에서 카푸어가 소식을 듣고 투자에 참여하게 된다. 개발연구에 돈을 투자하며, 예술가 중에서 본인만 사용할 수 있도록 독점 계약을 맺는다. 기존에 반타 블랙 안료를 구매했거나 소지한 개인, 기업의 안료를 모두 압수하고, 본인이나 본인과 가까운 지인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당연히 미술계에선 심한 반발이 일어나고, 그중에는 영국의 젊은 예술가 스튜어트 셈플이 선봉에 서게 된다. 스튜어트 셈플은 아니쉬 카푸어에게 보란 듯이 세상에서 가장 핑크빛인 핑크색, World Pinkest Pink 색상을 만들고 누구든지 이 색을 살 수 있게 했다. 단 한 사람, 아니쉬 카푸어만 빼고 말이다.

스튜어트 셈플의 스토어 사이트. 사이트 여기저기서 아니쉬 카푸어에 대한 반감을 느낄 수 있다..(https://culturehustle.com/)

하지만 아니쉬 카푸어는 지지 않고 스튜어트 셈플의 안료를 구해 대응을 한다.

from 아니쉬 카푸어의 인스타그램에서

이후로 스튜어트 셈플은 유리가 들어간 안료(손 넣으면 다치게!), 카푸어 없는 카푸어 생일 축하 파티 열기 등으로 대응하며 둘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 예술적 움직임에 유치한 감정싸움이 개입되었다며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아니쉬 카푸어는 전혀 개의치 않고 거침없는 작품 활동과 자기주장을 하며 이슈를 만들어 내고 있다.

스튜어트 셈플 및 MIT에서 반타블랙에 맞먹는 검은색을 발명하며 "가장 어두운 블랙"의 상징성은 이제 모두의 것이 되어버려 카푸어의 독점은 한낱 객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한 예술가가 현대미술씬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갖기 위해 고군분투한 대표적인 사례로 남게 되었다.

 

때로는 이슈를 부풀리기도 하며 노이즈 마케팅을 적절히 활용하는 전략은 그의 작품 브랜딩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거대한 규모로 관객에게 압도감과 불안감을 주고, 때로는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기 센 작품들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금번 한국에서 진행되는 전시물들도 그 규모와 과격한 표현에 놀라게 된다.


작품 정보/감상

국제 갤러리는 총 4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3개의 건물에 걸쳐 작품 전시를 하고 있다.

입구인 K1에서는 과슈 작품들과 시그니처인 반타 블랙 작품들이 있다. 
과슈 작품들은 혼돈 속에서 문 내지는 창문을 암시하는 어떤 영역을 묘사하고 있다.  불타는 지옥에서 단 하나의 탈출구 같기도 하고, 공포영화의 클리셰처럼 더 위험한 것이 저 너머에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가야만 할 곳처럼 보이기도 한다. 

같은 K1 더 내부로 들어가면 반타 블랙을 이용한 작품들이 있는데, 어떤 미술적 표현 방법이라던가 작가의 감정을 본다기보다 신기해서 보게 되는 것 같다. 입체 도형이지만 명암과 반사가 느껴지지 않아 정면에서 볼 땐 평면으로 보이는 작품이라던지, 둥근 원형의 반원 그릇이지만 평면체인 듯 보인다던지.. 가까이 들여다 보아도 잘 구분이 되지 않아  꽤 오랫동안 여러 각도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카푸어는 "회화란 무언가를 가시화하는 방식에 대한 역사인 반면, 나는 그와 정반대의 일, 즉 무언가를 어떻게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천착했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그를 위해 두 종류의 작품들을 한 장소에 위치시킨 것이 아닐까 싶었다.

Non-Object Black / 2016 / 39*39*39cm

정면에서 보면 단순한 사각형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분명히 입체 도형 위에 도색을 한 모양이다

Black / 2023 / 알루미늄, 페인트 / 144*144*39cm

안으로 파인 입체 원형이다. 원의 단평면으로 보일 뿐...

K2에서는 작가의 회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K1을 나와 아늑한 조경을 즐기며 걷다 K2에 들어서는 순간, 나오시던 한 50대 여성 관람객이 '아유~ 난 이런 거 싫어~' 하고 손사래를 치며 나왔는데... 왜 그러셨는지 들어가서 알게 되었다. 들어가자마자...'유혈이 낭자한 내장을 연상시킬 뿐 아니라 존재의 개화를 암시하고자 했다'라는 작품들로 압도된다. 나 역시 좀 부정적인 의미로 압도당했다.

K2관 전시 내부 (from 국제갤러리 홈페이지). 순화를 위해 작은 이미지로...

작품들의 스케일마저 엄청나게 크다 보니 트라우마가 있다던가 하는 분들은 보기에 힘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장이나 피가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작품들이 많아서 2관의 작품들은 사진으로 담기가 썩 내키진 않았다.) 압도적으로 격렬하고 거칠고, 정지된 회화이지만 끊임없이 강하게 움직이는 느낌이다. 누군가에겐 거대하고 거친 표현이 불타는 생의 의지로 다가왔고, 누군가는 지옥의 모습 같다고 말했다. 같은 것을 바라보지만 서로 다른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이 참 흥미롭다.

Untitled / 2021 / 캔버스에 오일 섬유유리 실리콘 / 244*305*46cm

그나마 제일 순한 맛의 회화 한 점. 손상된 세포들이 살기 위해 격렬한 운동을 하는 듯하다.

슬래쉬 무비를 한편 본 듯한 께름칙한 기분을 안고 K3으로 향했다.

K3에서는 4개의 거대 설치물이 있다. 각각 3~4m에 이르는 대형 전시물로, 직접 봐야 느껴지는 감동이 있다. 한 면에 하나의 작품씩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데, 이번 전시 주제의 정수를 한 번에 보여주는 클라이맥스 같은 느낌이었다.

Moon Shadow / 2018 / 실리콘 섬유유리 거즈 / 406*315*160cm

운석의 한 덩어리를 통째로 떼어 와 보고 있는 듯했다. 어두운 그림자 안에 미지의 존재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두렵지만 호기심을 자극하여 더 안을 들여다보고 싶게 하는 심리가 제대로 자극되었다. 

붉은 작품 2점은 살아있는 동물의 신체 조직 일부를 잘라 확대해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거즈 사이로 삐져나온 실리콘 덩어리들이 작은 세포 돌기들처럼 보여 더욱 그러했다. 살아있는 생명의 순간을 생생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나 싶었다.

K3 전시관 내부

여러 의미로 화제의 전시가 될 만하다고 느껴졌다. 세계적으로 핫한 작가의 대형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기회이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최근 다른 갤러리들에서 전시되는 작품들이 다소 포근한 풍의 작품들이다 보니 더욱 대비되어 인상 깊었다.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전시이니 조금 노력을 들여서라도 꼭 가보시길 추천드린다.


1시간 남짓한 관람 시간 동안 격렬해진 감정으로 인해 심신이 많이 피로해질 수 있다. 그럴 땐 미술관 옆 백미당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안정을 취해보시길 추천드린다. 혹은 쾌청한 가을 날씨를 즐기며 삼청동 길을 따라 올라가 다양한 디저트 가게나 미슐랭 스타 수제비집에서의 식사 코스도 좋을 듯싶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