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주 - 동네 시리즈, 공간의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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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볼까?/그림리뷰

정영주 - 동네 시리즈, 공간의 향수

by 게으른_완벽주의자 2023.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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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이나 길고 더웠던 여름이 물러가고 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내리면 저녁이 지나 밤이 다 되어가는 시간임에도 쨍하던 햇살마저 그 끝이 짧아졌다. 이전보다 이르게 땅거미 지는 퇴근길의 아파트 단지에는 한 집 두 집 불이 켜진다. 문득 그 광경이 정영주 작가의 달동네 시리즈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영주 작가의 달동네 시리즈는 어릴 적 언젠가의 어떤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한참 잊고 있어서 머릿속 어딘가에서 엉키고 뭉뚱그려져 있지만, '어린 시절의 동네'라고 하면 으레 머릿속에 그려지는 풍경 그리고 추상적인 기억들을 말이다.
나의 기억속에서 골목길 안의 나는 정신없이 놀다가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과 서늘해진 공기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훌쩍 넘었음을 깨닫는다. 놀이의 흥분이 가라앉고 어두운 보랏빛이 퍼져가는 골목길에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거무스름하게 형체만 보이던 집들에도 허연 형광불이 켜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골목 안은 소리와 냄새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 어느 집에선가의 사람들이 도란거리는 소리, TV에서 나오는 만화영화 주제가 혹은 티비 앵커가 뉴스를 말하고 있는 소리, 찌개를 끓이거나 생선을 굽는 냄새...
그리고 집까지 가는 이정표마냥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엄마에게 혼날까봐 그 길을 달려가기도 했고, 혹은 통닭을 사들고 오시는 아빠를 마중하러 서성거리기도 했다. 

Dusk 905 / 50호 / 캔버스 위에 한지 아크릴릭 / 2018

달동네 시리즈의 화가 정영주라고 하면 RM이 주목한 작가, 완판 작가, 크리스티 경매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1994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에서 유학한 작가는 2008년부터 집을 그리기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작업하던 중, IMF 외환위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온 지 10년이 됐을 때였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있던 작가는 귀국 후 유년기를 보낸 부산 고향의 산동네 풍경을 화폭에 담으면서 당시의 고통을 치유받았다고 한다.

 

“어느 날 고층 건물들 사이에서 곧 허물어질 듯한 판잣집을 보았습니다. 고층 건물과 대비되는 그 모습이 초라하고 힘든 나 자신 같았어요.”


그때부터 추상화를 그리던 그의 캔버스에 집이 담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빌딩 사이에 아주 희미하게 불 밝힌 집이었다. 그러나 그림을 계속 그릴수록 빌딩은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작은 집들이 주인공이 됐다. 캔버스 위에 콜라주 하듯이 한지를 오려 붙이면서 집의 존재감은 더 뚜렷해졌다.

새벽길 15910 30호 / 캔버스 위에 한지 아크릴릭  / 2015

작가는 캔버스에 스케치한 뒤 지붕과 벽 모양으로 한지를 구긴 뒤 찢어 붙이고,모양을 잡아가며 집을 하나씩 완성한 다음 말려서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한다. 종이를 구겨서 쓰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 노화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표면이 굴곡진 한지의 질감과 한지에 스민 색채의 깊이는 오래된 시간의 흔적과 삶의 애환을 촉각 화하고 마음속에 더 깊이 각인시킨다.

 

집과 길을 그리고 나서 그림을 완성하는 가장 마지막은 불빛이다. 화면에 불빛이 더해지며 어둡고 스산했던 밤 풍경에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작고 초라한 집들이 서로 기대어 내일을 꿈꾸는 보금자리로 변화한다. 이때가 동네시리즈에 반하게 하는 매력이 태어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기억 속 그리운 장소에 희망처럼 빛나는 온화한 불빛이 끝없이 이어지는 안도감. 지금의 노스탤지어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다.

 

비슷한 듯 미묘하게 다른 시리즈 안의 풍경들은 어떤 지역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우리 모두 그리워하는 마음속 풍경을 담은 상상 속 세계다. 그래서 그림을 보는 사람들 모두에게 문득문득 생각은 나지만 흐릿해진, 그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다른 듯 같은 모습의 기억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 기억속에 살던 사람들과 나는 어떠했는지,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도 날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무엇인지, 무엇이 지금 떠올리는 과거를 아름답게 불러올 수 있게 해 주었는지..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기도 하고 나아갈 수 있는 모티브를 다시 일깨워주기도 한다. 과거를 그림으로써 내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 그것이 작가가 동네 시리즈를 계속하는 이유일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본다. 

소중한 추억에서 힘을 찾아 내일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작가의 바램과도 같은 응원의 불빛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란다.

산동네-가을 1128 / 50호 / 캔버스 위에 한지 아크릴릭 /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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