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 - 빛과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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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볼까?/그림리뷰

르누아르 - 빛과 색

by 게으른_완벽주의자 2023.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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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화가를 묻는다면, 난 언제나 첫손가락에 르누아르를 꼽는다.

어릴 때, 취미로 미술을 공부하던 고모가 아버지에게 선물해 주었던 그림이 있다. 여러 번의 이사 도중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그 그림은(ㅠㅠ) 두 소녀가 악보를 훑어가며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이유는, 그 그림이 주던 분위기 때문인 것 같다. 노랑과 빨강을 주()로 하여 따스하고 풍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었고, 그림의 모델조차 장밋빛 뺨이 발그레한 두 소녀였다. 그 밝고 부드러운 분위기는 내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닿아있어 항상 그립고 소중한 이미지가 되었다.
그것이 르느와르의 그림이었음은 아주 나중에 알게 된다.  이후로도 르누아르의 그림은 아득한 그리움과 색이 주는 따스함으로 항상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오늘은 르느와르와 그의 그림 몇 점을 보려고 한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 ~ 1919)

르누아르는 도자기로 유명한 프랑스 중부 산악 지대의 리모주에서 태어났다. 재봉사 아버지를 둔 그는 성실한 태도와 손으로 하는 일에 대한 애정이라는 좋은 의미의 직인 기질을 이어받았다.

르누아르가 4살일 때 그의 집은 파리로 이사했는데, 생활은 여전히 가난했기 때문에 르누아르는 13살 때부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직인으로 일하게 된다. 만년에 유명해지고 나서 그는 다시 도자기의 세계를 즐기게 되었는데, 아마도 힘들었던 소년 시절을 그립게 회상하고 있었나 보다.

기계로 인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그가 일하던 도자기 공장이 망한다. 덕분에 르누아르는 부채에 그림을 그리거나 창문 블라인드에 페인트 칠하는 일까지 해야 했다.

그러던 중 1862, 21살 때부터살때부터 파리 국립미술학교 교사였던 샤를 글레르의 아틀리에에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2년 반에 걸친 기간 동안의 공부는 그의 그림 양식에 어떤 직접적인 성과를 주진 않았지만, 모네, 시슬리, 바지유 등 훗날의 인상파 동료들을 알게 된다.

1870년대, 인상파의 기법에 깊이 젖어 있던 시절의 르누아르는 깨끗하고 밝은 색채의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1880년대에 들어와 인상주의에 의문을 품게 되고 마침내 후반생의 독자적인 풍부한 양식으로 옮아간다. 이 양식의 전환에는 1881~1882년에 걸쳐 알제리,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지중해의 밝은 태양과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 작품을 접한 것이 큰 역할을 했으리란 것이 후대의 추측이다. 그리고 만년에는 파리보다 지중해의 밝고 따뜻한 풍토를 사랑해서 종종 프랑스 남부를 찾았는데, 1903년 이래로 파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뉴에 살며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1919년에 세상을 떠났다.

 

인상파 이래로 근대 회화의 역사는 전통적인 것에 대한 반역을 중요한 동력원으로 삼아 발전해 왔다. 그런 만큼 그 역사를 떠맡아 온 거장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통 사회에 대해 반역자가 되어야 했다.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이 처음 작품을 세상에 선보였을 때, 심한 조소와 욕설이 퍼부어졌던 일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리하여 사회에 등돌리고 비난을 받으며 묵묵히 자기 길을 찾아가는 예술가의 드라마가 미술사에서는 클리셰가 되기도 한다 (고흐ㅠㅠ)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상황에 르누아르는 거의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평온한 생활이 지닌 행복과 기쁨에 차 있고, 반역이라든가 비극과는 전혀 무관한 것 같다.
인상파 그룹에 가담하고 있던 때의 르누아르도 역시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었다. 그러나 인상파 그룹 화가들 가운데 그가 가장 먼저 세상에 받아들여졌다. 그가 그려낸 그림에는 모든 사람을 매혹시키는 평화로운 빛이 있다.

르누아르는 시민들의 취미에 부응하듯 밝고 행복한 주제만을 그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통속적인 주제들이지만, 그런 통속성이 지금까지 시들지 않는 그의 인기를 지속시키는 요인이기도 할 것이다.

 

 

< 피아노 앞의 소녀들 > 캔버스에 유화 / 116*90cm / 1892년 작 / 파리 오르셰 미술관

< 피아노 앞의 소녀들 >

이 그림이 위에 말한 르누아르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예시이자, 우리집에 있었다는 모작의 원본이다 (^^)

자매인 듯한 두 소녀가 피아노 앞에 사이좋게 붙어 있다. 흰 드레스에 파란 허리띠를 맨 금발머리 소녀는 한 손으로는 악보를 잡고 다른 한 손을 건반에 놓은 채 열심히 몰두하고 있다. 붉은 옷을 입은 소녀는 의자 등받이를 잡은 채 금발머리 소녀가 연습하는 악보를 다정하게 같이 읽어주고 있다. 서 있는 소녀의 느긋한 표정과 진지하게 악보에 몰두한 소녀의 표정을 읽다 보면 우리 역시 이 그림에 집중하게 된다.

이 흐믓한 정경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손 뻗으면 닿을듯한 가까운 거리에 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떠듬떠듬 치는 건반 소리와 소녀들의 조용한 말소리까지 들릴 듯하다.클로즈업의 효과인가? 이런 클로즈업 구도를 르누아르는 작품에서 꽤나 효과적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기 전에 이 작품에게서 풍요롭고 따뜻한 인상을 받게 되는 이유는 색채에서 온다. 앉아있는 소녀와 악보의 흰색을 빼면 대부분이 녹색과 빨강 노랑이라는 풍부하고 따뜻한 색조로 이루어져 있다. 배경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커튼은 짙은 녹색 베이스에 빨강 및 노랑의 반사를 보인다. 그 커튼 뒤로 보이는 벽이나 가구는 빨강을 주조로 하며, 벽에 걸린 그림틀의 노랑이나 그림 속 녹색이 호응하고 있다. 뒤편 실내의 빨강은 서 있는 소녀의 옷까지 연결되고, 의자의 쿠션이나 오른쪽 아래 구석의 악보가 놓인 가구에까지 이어진다. 화려한 금관 악기 같은 노란색의 울림이 화면 곳곳에 더해지고 있어 온화한 분위기는 배가 된다.

 

이렇듯 르누아르의 그림은 특히 1880년대 이래로 풍부한 색을 연주하고 있다.

비슷한 류로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들 수 있겠다

< 물랭 드 라 갈레트 > 캔버스에 유화 / 131*042cm&nbsp; / 1876 년작 / 파리 오르셰 미술관

<물랭 드 라 갈레트

부드러운 태양 빛을 받으며 즐겁게 춤추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묘하게 경쾌하다. 어두운 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지만 결코 무겁지 않고, 나뭇잎을 뚫고 쏟아져내린 빛이 화면 곳곳에 만들어낸 얼룩은 리드미컬하게 보인다. 자유롭게 볼을 맞대고 웃는 얼굴들을 보고 있으면 지금 이 그림 속의 사람들이 얼마나 여유롭고 행복한지 알 수 있다. 벤치 등받이에 걸치고 뒤에 앉은 신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숙녀들 뒤에 내가 앉아, 나도 이 흥겨운 현장에 속한 사람인 듯한 기분이 든다.

 

위의 두 그림(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ㅎ)에서 보이듯 보색 효과를 이용한다거나, 형태의 윤곽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터치의 구사는 인상파 시대에 체득되었다. 그는 언제나 야외 풍경이라는 인상파 특유의 주제를 다룰 때에도 한결같이 인물을 배치하기를 좋아했다. 고운 피부 밑에 따뜻한 생명이 흐르는 여성미를 각별히 사랑했던 르누아르는 스스로도 고백했듯이 본질적으로는 인물화가이다. 그리고 이 점 때문에 그는 언젠가 인상주의와 결별해야 했고,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때 그는 데생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라며 생에 유일한(???!!!!) 예술적 위기를 맞는다.

인상주의의 색채 분할은 모든 것을 빛의 반짝임으로 환원하여 그리기 때문에 대상의 실질적인 무게와 형태를 없애버린다. (이 표현을 최대치로 끌어낸 작품이 있다면 모네의 <양산을 쓴 여자>가 있겠다.) 그래서 인상파 기법으로는 모든 인물이 빛에 빠져 녹아버리고 색으로만 남게되어 인물 표현에 한계가 오고 만다

실제 손으로 쓰다듬을 수 있을 것 같은육체 표현을 추구했던 르누아르는 결국 인상파의 색채표현을 부정해야 했다… (ㅜㅠ) 1884~1887년에 걸쳐 시도한 그의 대작 <목욕하는 여자들>이 그런 몸부림이었다.

<목욕하는 여인들> 캔버스에 유화 / 117.8*170.8 cm / 1884~1887 / 필라델피아 미술관

이 시기는 명확한 선묘 표현 덕분에 앵그르 양식의 시대라고 불린다. 가위로 오려낸 듯 명확한 윤곽선을 가지고 풍경과 분명히 구분되다 보니육체는 형태를 얻게 되었지만 배경과 동떨어지는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 작품 하나 그리자고 3년이나 걸린 이유도.. 이 부분에 만족하지 못해서이지 않을까? 이후 다시는 선묘 표현에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

 

그의 인생에서 어쩌면 하나의 에피소드같이 되어버린 선묘표현 시대는 인상파와 결별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였다. 3년의 깨달음으로 이후 그는 색채에 의해 대상에 살을 붙여가는 특유의 양식을 획득한다. 그가 추구한 실제로 쓰다듬을 수 있는실질적인 존재감을 얻음과 동시에 같은 색채 표현을 하나로 녹여 조화로운 화풍을 가지게 된다. <피아노 앞의 소녀들>이 그러한 성과 가운데 최초의 작품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이후 지난달 방문한 국중박의 전시회에서 작은 르누아르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목욕하는 여인의 앉아있는 뒷모습이었다.그 그림에서는 여인의 나신임에도 풍부한 빛과 색채로 인해 성적인 의미는 찾아볼 수 없고 밝고 풍성한 에너지만이 생동했다. 빛으로 빚어진 사람, 따스한 표정과 평온한 분위기. 나에게 르누아르는 항상 5월의 햇살처럼 밝고 몽글한 기분이 들고 싶을 때면 찾아지는 화가이다.

<목욕하는 사람> 삐뚤 죄송...ㅠㅠ /영국 내셔널 갤러리 -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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